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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15. <부정공>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공휘기석묘갈명(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琪錫墓碣銘)
1. 문헌 목록 〉20. 20世 〉17. <부정공>이기헌공휘창석묘갈명(二既軒公諱昌錫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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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정공>학생공휘우석묘갈명(學生公諱禹錫墓碣銘)
學生公諱禹錫墓碣銘 今上庚寅玉川趙泳默葬其父監役公于順天雙岩面高岩山負艮原錄其行治遣胤子萬植請書于墓前之石曰吾父名禹錫字鳳擧江菴其號也生稟仁厚孝友天植事親服勤先意承順朝夕膳供躬必惟撤曰不如此審不安早齡贏弱夫卽入學先公以爲憂吾父慨然奮發就傳請學不待敎督文藝日就性頗嗜酒在親側未嘗變貌丁內艱恐胎先公憂不敢盡情號哭而傍人惟見其血出之淚先公老而沉疾左右扶持十年如一迎醫合藥竭誠球效及喪哀毀踰制至感畜狗與弟昌錫寢食同處不分物我子姪孫男多至數十亦克怡怡庭無間言推及宗族鄕黨各盡其誼或有過失輒以溫顔開諭買地結齋廣庤經史迎師以敎之御婢僕恩威並施錢穀出納未嘗置簿雖或忘失不悔也曾於校官見書籍散亂極加慨歎亟命几而藏之常曰人於文學信如神明悅若芻豢孜孜不己則豈有昏愚之不通也吾父有此篤行敢要一言爲不朽余病閣筆硏久矣苦辭而請愈勤乃按而敍之公玉川人上世諱元吉門下侍中諡忠獻有子諱瑜以高麗副正不仕我朝傳至梅窓諱大成遵晦諱時一 贈佐郞曾大父諱仁福大父諱禮淳考諱在益南原梁公德惠其外大父也公以仁陵丁丑九月十二日生今上甲申除繕工監假監役庚寅年七十四卒于七月二十二日越二年癸巳道儒擧公行請褒于朝 贈佐郞並旌其閭配陽川許氏暹女繼配高城金氏永煥女有子女各三長即泳默次泳憲泳翰女適梁相鵬曺昱承李相鳳長房男萬植冕植婿鄭雲璣次房男幼婿李玉來安圭萬金繼善季房男雲植餘幼曰灐默李龍淳妻梁婿出也曰秉默秉倫李熙玉妻曺婿出也嗚呼跡公所以處於父母昆弟之間者一是出於至誠而非勉强慕效之可幾也其本固己深矣故其爲政於家與夫行乎州里綽然皆有古人長厚之風宜其人之稱之無異辭旣沒而不倦兒前仁有美而莫之傳君子此之不仁若泳默可謂能傳者歟公之有以錫其類又可見矣是足以無愧於銘銘曰躬積其厚無彊裕後所其天褒煌煌榮耀之于家與鄕苟千秋之後陵谷不遷尙識其爲賢孝趙公之阡 德殷 宋秉璿 撰 학생공휘우석묘갈명(學生公諱禹錫墓碣銘) 태상왕(太上王) 경인(庚寅)년에 옥천(玉川) 조 영묵(趙泳默)이 자기 아버지 감역공(監役公)을 순천(順天) 쌍암면(雙岩面) 고암산(高岩山) 간원(艮原)에 장사(葬事)하고 그의 행적(行跡)을 엮어 그 아들 만식(萬植)을 보내 묘석(墓石)에 쓸 글을 부탁하면서 말한다. 『나의 아버지는 우석(禹錫)인데 자(字)는 봉거(鳳擧) 호(號)는 강암(江菴)이다. 인후(仁厚)한 성품을 타고나 효우(孝友)와 사친(事親)에 힘을 썼으며 어버이 뜻을 따르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만들어 직접 드리고 내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불안하다」 하였다. 어렸을 때 몸이 약해서 선공(先公)은 학업(學業)을 닦지 못할까 염려(念慮)했는데 나의 아버지는 선뜻 분발하여 선생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나날이 열심히 하여 문예(文藝)가 갈수록 성장 하였다. 술을 대단히 좋아 했지만 부모 곁에 있을 때는 상기된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 상(喪) 을 당했을 때는 선공(先公)이 걱정하실까봐 감히 정(情)을 다하여 울부 짓지는 않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소리없이 흘리는 피 눈물을 보았다. 선공(先公)이 늙어 병환이 심하자 十여년을 하루같이 좌우를 부축 하였으며 의원(醫員)을 데려다 약을 쓰는등 갖은 방법을 다 썼으며 상(喪)을 만난 뒤에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그 모습이 기르는 짐승 까지도 감동(感動)하였다. 아우 창석(昌錫)과 침식(寝食)을 함께하는등 네것 내것을 따지지 않으니 수 십명 되는 자손들도 화목하여 집안에 서로 헐뜯는 말이 없었고 종족(宗族)간이나 향당(鄕黨)에도 예의(禮義)를 다하여 누가 잘못이 있으면 온화(溫和)한 얼굴을 하고서 개유(開諭)시켰다. 또 땅을 사서 서재를 지어놓고 많은 책을 갖춘다음 선생을 모셔다가 자손을 가르쳤으며 비복(婢僕)을 시킬때 은혜(恩惠)와 위엄(威嚴)을 길이 느끼게 하고 전곡(錢穀)을 내고 드릴때 치부(置簿)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치부를 않다가 잊어먹는 경우가 있어도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향교에서 책들을 어지럽게 펼쳐 놓은 것을 보고 몹시 탄식하며 재빨리 정리해놓게 하고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을 신명(神明)같이 믿고 맛있는 음식같이 좋아하여 열심히 하고, 또 열심히하면 어찌 혼우(昏愚)하다고 통(通)하지 못할 까닭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이러한 행실을 갖추고 있으니 한 말씀하여 불후(不朽)가 되게 해달라』 한다. 내 병이 들어 필연(筆研)을 다한지 오래된 터 굳이 사양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간청하기에 하는 수 없이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쓴다. 공(公)은 옥천인(玉川人)이다 상세(上世)에 원길(元吉)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시(諡) 충헌(忠獻)이며 그의 아들 유(瑜)는 고려(高麗) 부정(副正)으로 조선조(朝鮮朝)에 벼슬을 하지 않았고 그 다음 호(號) 매창(梅窓)은 대성(大成) 호(號) 준회(遵晦) 시일(時一)은 증직(贈職)으로 좌랑(佐朗)을 지냈다. 증조(曾祖)는 인복(仁福) 조(祖)는 예순(禮淳) 고(考)는 재익(在益)이며 남원(南原) 양 덕혜(梁德惠)는 그의 외조(外祖)이다. 공(公) 순조(純祖) 정축(丁丑) 九월 十二일에 태어나 상황(上皇) 갑신(甲申)에 선공 감가 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받고 七十四세 나이로 경인(庚寅) 七월 二十二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二년이 지난 계사(癸巳)년에 고을 선비들이 공(公)의 행적을 조정(朝廷)에 알려 증직(贈職)으로 좌랑(佐朗)이 되었고 정려(旌閭)도 받았다. 배는 양천(陽川) 허섬(許暹)의 딸이고 계배(繼配)는 고성(固城) 김 영환(金永煥)의 딸인데 三남三녀(三男三女)를 두었다. 큰 아들은 영묵(泳默) 다음은 영헌(泳憲)·영한(泳翰)이며 딸은 양 상붕(梁相鵬)·조 욱승(曹昱承)·이 상봉(李相鳳)에게 출가했다. 장방남(長房男)은 만식(萬植)·면식(冕植) 사위는 정 운기(鄭雲璣)이며 차방남(次房男)은 어리고 사위는 이 옥래(李玉來)·안 규만(安圭萬)·김 계선(金繼善)이며 계방남(季房男)은 운식(雲植) 나머지는 어리다. 그리고 형묵(灐默) 이 용순(李龍淳)처는 양(梁)사위 자녀이고 병묵(秉默)·병륜(秉倫) 이 희옥(李熙玉)처는 조(曺)사위 자녀다. 아! 공(公)이 부모곤제(父母昆弟) 사이에 어떻게 행동 했는가를 살펴보면 공은 하나같이 지성(至誠)으로 임해왔지 억지로 해 온 일이 없다. 이렇듯 그의 사상이 뿌리를 내려 집안 살림을 대할 때나 주리(州里)에 나갈때 너그러운듯 고인장후지풍(古人長厚之風)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칭송(稱誦)하는 말이 죽고난 뒤에도 그치지 않는것이 당연하다. 옛 사람에게 있는 아름다움을 전해 주지 않는것을 군자는 불인(不仁)한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영묵(泳默)은 앞 사람의 아름다움을 잘 전한 사람이라 하겠다. 공(公)에게도 그 유(類)에 맞는 아름다움이 있는것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명(銘)에 쓴다는 것은 부끄러운일이 아니다. 명(銘)에 쓰기를, 몸 쌓은 후덕(厚德)함. 躬積其厚 자손이 이어 받네. 無彊裕後 나라님의 빛나는 포상 所其天褒煌煌 찬란한 그 영광이 집이며 마을이어라. 榮耀之于家與鄕 아마도 천만년 지난 뒤 이 능곡(陵谷)이 옮기지 않는다면, 苟千秋之後陵谷不遷 현효(賢孝)한 이 조공(趙公)을 기억 하리라! 尙識其爲賢孝趙公之阡 덕은(德殷) 송병선(宋秉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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